가장 최근에 나갔던 모델 대회를 준비하던 때 이야기다.
모델 대회 일정이 들쑥날쑥해서 서울의 친척집에 한 달간 머물렀을 때부터 책을 읽게 되었다. 모델 대회 심사결과 및 합격여부는 일정을 2~3일 앞두고 연락이 온다. 대부분의 면접이 그렇듯 불합격자는 탈락 문자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릴없이 다이어트와 피부관리를 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나 같은 경우, 전 에이전시와 계약할 때, 오디션을 보고 난 후, 연락이 안 올 거라 생각하고 곧장 부산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만약 떨어진다면, 불합격 여부도 모른채 서울에서 계속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 좋게도 당일 밤늦게 연락받고, 다음날 바로 다시 올라갔었다.
불편하긴 하지만 콘테스트를 개최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스텝분들이 필요하며 각각 헤어 메이크업 팀, 의상 팀, 디자이너, 모델들, 대회 총감독님, 방송사 PD님, 인솔자, 대회 주최 측 인사들 등등 많은 사람들의 일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의 스케줄을 미리 정확하게 알려주기란 쉽지 않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야외 행사가 있을 때는 날씨도 고려해야 한다.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는 2시간 10분이 좀 더 걸리고, 서울 내에서 또 이동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한두 번 왕복하면 숙박비를 제외해도 최소 16만원이 지출된다. 감사하게도 친척분이 한 달간 집에서 지내도 좋다고 허락해주셔서 그나마 돈을 좀 아낄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모델 지망생이나 신입 모델들은 오디션 합격과 기회의 불확실성을 감내하고 계속 다이어트와 운동을 병행하며 외모를 관리해야,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라 할 수 있는 각 소속사의 오디션 공지나 대회 공지를 찾고 실물 미팅이라도 할 수 있다. 게다가 모델들의 다이어트는 보기 좋은 몸매를 위한 다이어트지, 건강한 몸을 위한 다이어트가 아니다. 나 역시도 아주 심각하게 마르기 위해서 노력했고, 대회를 통해서나 소속사에서 만난 21살 안팎 나이대의 모델분들도 다들 건강이 안 좋았다.
시즌이 다가오면 링거를 맞고 버티는 사례도 몇몇 있었고, 한번은 저혈당으로 대회 심사 도중 쓰러지는 모델도 있었다. 나 역시도 원래부터 안 좋은 무릎이 모델 워킹 연습과 과도한 유산소 운동 및 저칼로리 식사로 많이 상했다.
그래서 촬영이나 패션쇼에서 접한 모델들은 멋있지만, 간혹 일상에서 실제로 우연히 봤을 때는 마치 멋진 옷을 입은 길쭉길쭉한 병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친구들이 내 모델 활동 사진을 보면, “눈빛이 살아있네”, “눈에 소울이 담겨있네”라고 말해주기도 하는데, 그건 그냥 너무 배고프고 힘이 없어서 마치 ‘소울리스’한 감성의 눈빛이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면 사람이 되게 몽롱해진다. 앉아있다가 일어나면 어지럽고, 누워있다가 일어나면 당연히 어지럽다. 대부분의 시간을 무념무상한 상태로 보내게 된다. 나는 서울까지 올라와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어서 뭐라도 많이 하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으로 교보문고를 가게되었다. 작은 동네서점말고 전국에 지점을 둔 체인 서점은 21살에 광화문 교보문고를 갔던게 처음이었다. 작은엄마를 도와 초등학교 1학년 사촌동생이 즐겨보는 카카오 프렌즈 만화책을 사고 밥도 먹을 겸 해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따라갔다. 교보문고에 대한 첫 인상이 무척 좋았다.
남의 집에서 자면 늦잠 자기가 미안할 법도 한데, 나는 염치없이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는 했다. 게다가 대회는 막판에 낙방하고 오디션도 2차로 개별 연락이 오는 곳이 거의 없어서 할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살던 부산의 시골 동네와 달리 아주 큰 지적, 문화적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밖에서 본다면 다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쉬는 날에 책을 보러 오신 직장인, 주부, 어르신들을 서점에서 보니 또 그들의 독서 열의에 합류하고 싶은 충동도 느껴졌다. 직접 책을 실물로 보고, 표지도 만져보며 작가 소개글과 머리말, 닫는 글, 목차를 살펴본다. 거기에는 책의 탄생 계기와 책이 나에게 하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렇게 내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는 도서를 구매하고 귀가하는 길에는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더블 샷으로 하나 시켜놓고 두세 시간 책을 보고 들어가곤 했다.
아니면, 저녁까지 교보문고에서 책을 봤을 때는, 평소에 내가 ‘서울’에 대해 떠올리던 이미지와 가장 유사한 광화문 광장 근처에서 직장인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했고, 대도시의 기분을 만끽하며 한 손엔 구입한 책을 들고 걸어 다녔다.
검은색 신발과 검은색 테이퍼드 핏 바지, 검은색 무지 반팔티, 헤어는 젖은 스타일로 연출하고 주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난 나르시시즘에 취해 다녔었다.
그다음엔 서촌에 위치한 내가 사랑하는 LP Bar에서 내 신청곡을 듣고, 맥주로 시작해서 독한 술들로 마무리하며 은은한 불빛에서 아늑함과 고요함을 느끼다가 몽환적인 느낌이 들 즈음에 Bar를 나온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서 고요함을 찾으면 이미 12시가 넘어있다. 택시 타고 기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집에 도착하면, 새벽까지 집에서 또 책을 읽다가 눈과 머리를 식혀줘야 할 때쯤, 집 바로 앞에 있는 ‘커핀 그루나루’ 카페에서 마감하고 늘 열어두는 테라스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 나온 커피를 마시며 책을 마저 보곤 했다.
나는 처음 서울에 올라올 때 했던 다짐이나 목표와 달리 이렇게 아주 즐겁게 서울에서 1달을 지내고 내려왔다. 물론, 내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인생에 필요한 더 큰 것을, 아무에게서도, 아무 데서도 쉽게 배우고 느낄 수 없는 무언가와 감정을 배워왔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웬만한 주변 에너지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내 결심이나 포부를 뒤흔들러 스쳐온 에너지를 튕겨낼 수 있다.
그리고 책은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일단,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 계발적인 요소인 독서를 바쁘고 지겨운 일상에서 해낸다는 것 자체가, 읽는 책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특별함을 가져다준다.
요즘 읽고 있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자면, 작가는 '여행'을 이렇게 정의한다.
여행이란 목적지에서 뜻밖의 일들을 겪고, 출발지에서 갖고 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출발 전의 서울패션위크 20s/s 시즌 오디션 합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독서의 즐거움을 얻고 돌아왔다. 나는 서울로 한달짜리 여행을 갔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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