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중위권정도 밖에 유지하지 못했던 학생이었다. 그래도 수학을 제외하면 평균 중상위권은 했던것 같다. 수학을 너무 힘들어해서 그냥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를 작은 공책에 옮겨적어서 들고다니며 외웠고, 잠꼬대로 이 문제들을 웅얼거리기도 했다. 수업 외에도 하루에 자습시간 8시간을 확보하며 지냈고, 그 중 매일 5시간 이상을 수학에 투자하고 남는시간에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 그럼에도 내 수학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난 매번 중간고사와 기말 고사를 넘어, 쪽지 시험이나 교과서의 한 단원을 마치면 각 단원 끝부분 마다 있는 단원평가를 풀고도 절망하곤 했다.
나는 어릴때 부터 100%문과 성향이었지만, 취업이다 뭐다해서 어쩌다보니 고교2학년 때 화학과 생물을 선택한 후로부터 학교 교육의 부적응자가 되었다. 그 전에도 한국교육 시스템에 의심과 불만이 많았지만 그냥 참고했었다. 그리고 고2 때는 그 불만과 회의가 최고치를 갱신했고, 누가봐도 부적응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원래 내가 있던 궤도에 진입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열심히만 했지, 공부에도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미련하게도 첫 수능 직후 수험장을 나오면서 내 공부법이 단단히 잘못 되었으며, 다른 공부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나는 고3 때도 모델이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델이 되지 않았을 때, 혹은 다른사람으로부터 ‘쟤는 공부 못하는데, 키크니까 그냥 모델하는가 보다’ 라는 소리를 듣게된다면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내가 하고싶은 꿈과 점점 멀어지는 공부에 사력을 다하며 견뎌온 시간이 억울했다.
지금은 이미 늦었고, 부모님과도 합의를 봤기 때문에, 정 하고 싶다면 나중에 하더라도 모델로서 실패해도 잘 살수 있는 길을 닦아 놓으려고 적성에 맞는 전공의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사실상 모델이라는 꿈은 아예 접은 상태였다. 그래서 선택한 내게 맞는 적성과 학교교육의 합의점을 찾은 곳은 ‘한의대’였다.
당시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과 동시에 고3 6월달, 재수를 결심했다. 평소, 애살과 욕심이 많아서 늘 수업이 끝난 후에 질문하러 선생님께 찾아가며 공부해도 성적이 좋지않아서 선생님의 신임과 안타까움을 함께 받던 나는 그 일로 골칫덩이와 철부지로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각종 비난과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내가 어렵게 결정한 꿈마저 다시 이상과 현실에서 타협점을 찾아야하나 고뇌했다. 이과생이라면 무조건 화학공학, 전기-전자공학, 기계공학 등의 취업에 유리한 공과대학이나 적어도 학과명에 '공'자가 들어가는 공대에 진학해야만 한다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말에 흔들려, 나는 일직선으로 가야하는 내 길위에서 지그재그로 걷게 되었다. 태클이 난무한 것이다. 그리고 난 그 태클에 속절없이 당해버렸다.
시간이 좀 지나고, 고3 수능 성적발표가 났다. 나는 고3 여름부터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해의 수능은 경험삼아 보러갔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고민없이 찍었다. 특히 국어는 지문을 감상했고, 영어는 대충 읽고 풀었다. 시험지의 문학 지문을 감상해본다는 것은 정말 찢어지는 희열이었다. 그것도 수능 수험장에서.
나는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난 다음날 아침, 경북 상주시 화동면 양지리의 팔음산 중턱에 위치한 시골의 고시원행에 올랐다. 고시원 시골길엔 분명히 차갑지만 따스한 눈이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실패한다면 나는 공부를 못한다고 인정하고, 잘하면 좋은 것이라는 각오로 갔다. 나는 결과에 승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거기서는 아무 태클없이 내 20살을 불태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했다. 그래서 따스했던 것 같다.
1월달~10월 달까지 공부하며 나는 공부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인정한다. 나는 당시로부터 계속 5수를 했어도 서울대 입구도 못 갈 놈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머리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난 그냥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큰 것 같다. 문학작품은 왜 분석 해야하는지 이해도 안되고, 시에 관한 문제도 시인이 자기 시의 문제를 틀리게 만들고 작가의 의도와 다른 선지를 정답으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 교육에 반발심을 느꼈다. 나의 학교생활은 시간낭비였다. 재수를 하면서는 내가 더 이상 표준화되어 정해진 공부만 할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내 꿈을 위해 도전하기로 마음먹으며 수능을 한달여 남겨둔 채, 부산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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