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고향집으로 내려온 이후, 나는 집 근처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비보조원으로 일하며 모델이 되기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일이 없는 날엔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의 영어카페를 가서 영어를 배웠다. 재수하고 막 나온터라 머릿속의 빠삭한 문법과 단어 덕분에 하루하루 영어가 느는게 느껴졌다. 일도 하고, 영어카페도 다니면서 모델이 되기 위한 다이어트를 8개월 동안 했다. 출근하는 5일을 6시에 기상해서 헬스장을 들리고, 퇴근 후 저녁8시에 다시 헬스를 가고 쉬는 날엔 영어카페를 가는 생활을 했다. 물론 가끔씩 아침운동을 빼먹은 날도 있었다. 그러고 모은돈으로 여드름 투성이였던 나는 피부과도 다니고 부산에서 YG kplus 모델 아카데미를 다녔다. 아카데미 3개월 과정중 2개월 차에 처음나간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그 해에 나간 3개 대회에서 모두 입상했다. (대상, Top 10, 은상; 대상을 받은 대회부터 순서대로 각각 70명, 500명, 300명 정도의 지원자가 있었다)
부모님을 통틀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바뀌었고, 대우도 달라졌다. 기쁨보단 가증스러움에 극치를 떨었다. 모델을 하며 당시 21살, 내 나이에 만나기 힘든 나이대의 사람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영어카페에서 사귄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통해 내가 세상을 보던 창은 더 넓어졌고, 대학교육과 대학생활의 필요성을 느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한 대학 교육을 받고싶었다. (물론, 지금의 내 생각은 또 다르다 = 휴학한 이유) 평소 언어에 관심이 많아 독학을 많이 했지만 늘 한계가 있었다. 자료수집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래와 어울리고 놀면서 배우는 것도 살아가는데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서울권 대학을 가겠다던 나에게는 또 다시 다른 비아냥이 쏟아졌다. “꿈 깨라” “시간 낭비다” “지금 갈거면 작년에는 왜 안갔냐?” 등등. 원서를 쓰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다니던 고등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모델이 된 나를 반김과 동시에 내가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교에 원서를 쓰겠다고 하니 “네가?”라고 하던 선생님도 계셨고, 이 선생님 때문에 나중에 한국외대에 붙고나서 합격소식을 알리러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나는 고교 이과 출신에 생활 기록부의 장래희망란에 1학년 때 패션모델, 2학년에는 원자력 공학자, 3학년은 전자공학자라고 기입되어 있었고, 20살때는 또래들이 독학재수 학원이나 대기업 교육 업체가 운영하는 N수생 전문 학원에 가는 것과 달리 하루에 버스가 2번 들어오는 경북의 산골 시골 마을에 고시원에서 재수했고, 10개월을 공부하다 그 해의 수능을 응시하지 않은, 21살의 모델이자 한국외대 독일어 통번역학과 지원자였다. 이런 나는 외대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했고, 합격 후, 시선은 다시 바뀌었다. 나는 이 때에 살아가는데에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을 통틀어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구나.”
다른 사람 시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나는 이 2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오롯이 나에게 미쳐있었기 때문에 다른사람들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지금, 당시를 되돌아보면 느끼는게 많다. 그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게 있다.
"꼭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었어야 했던가"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고3이었던 동생에게도 미안하고 부모님께도 죄송하다.
하지만, 단단히 잘못되어 굴러가던 내 인생을 내가 정말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고, 정말 그랬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내 부족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완강한 부모님을 절대 설득할 수도, 내 스스로 용기를 갖고 무언갈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무식하게 덤빌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것을 나에게 쏟아 부었고,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어렵게 입학할 수 있었던 학교를 1학기만 다니고 휴학했다. 나중에 지금보다 더 넓어진 창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나를 위해 자퇴하지 않았고, 글을 쓰며 번역도 하고, 고등학생때 다니던 학원에서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개인사정상 번역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아웃렛 안전팀에서 일한다. 이제 곧 4개월차가 되어가고있고, 슬슬 복학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걱정하며 화도 낸다. 정신차리라고. 이 정도 하고 싶은 대로 말썽부렸으면 된 것 아니냐고,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앞으로도 결과가 좋을 것 같냐고.
이들에게 내 계획과 생각을 설득할 시간과 에너지도 아까우며,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안정성을 추구하며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이 현명하고 옳은 일이라고 믿고있다. 오히려 내가 걷는 길 위에서 목표를 향해 가는 나를 지그재그로 걷게 만들 뿐이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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